納棺夫 日記
제1장 진눈깨비의 계절
………
*
드디어 진눈깨비가 내렸다.
산의 단풍은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는 하얀 눈더미에 뒷덜
미를 잡히지 않으려는 듯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산
기슭을 향해 달려내려온다.
그러면 산기슭 농가의 감나무 잎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가지 끝에 빨갛게 익은 감이 홀로 남을 무렵이면 진눈깨비
가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계절이 오면, 마을 여기저기에 연어
가 일제히 매달린다.
어물전 처마 끝에 일렬로 늘어서기도 하고, 어물전 앞 플
라타너스 가로수에 걸친 장대에 매달리기도 한다.
아가미에 새끼줄이 끼워진 연어는 커다란 입을 벌린 채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에는 다테야마 연봉(連峰)에 가로막힌 비구름이 서로
뒤엉켜 낮게 깔린 채 꼼짝달싹하지 않는다.
납 색깔의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진눈깨비가 떨어져 내린
다. 이처럼 진눈깨비에 젖은 차가운 흑백 풍경이야말로 이
지방 특유의 풍경이라 할 수 있다.
기상이 풍토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산에 눈이 내리는 것
이 아니라 눈이 산을 만들어 간다.
진눈깨비가 오기 시작하면 이 지방 사람들은 겨울이 왔
음을 실감한다. 어떤 해에는 11월 하순부터 12월 하순까지
진눈깨비가 올 때가 있다. 일본의 다른 지방에는 없는 '진
눈깨비의 계절'이 있는 것이다.
'진눈깨비'라는 단어는 영어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 Sleet
라는 단어가 사전에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얼어붙은 비(凍雨
)라는 뜻이다. 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눈도 아닌 진눈
깨비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는 아니 것이다. 요컨대 영어권
에서는 진눈깨비처럼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애매한 사상
(事象)은 용어로서 정착되어 있지 않은 것이리라. 시시각
각 변화해 가는 현상을 언어로 나타내는 일이 영어권 사람
들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닌 모양이다.
그것은 생사를 드러낼 때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사상으로는 생이 아니면 사이지 '생사'라는 관념은
없다.
그 점 동양사상, 특히 불교는 생사를 일체로 여겨왔다.
생과 사의 관계를 진눈깨비 가운데의 비와 눈의 관계처럼
바라보자면, '생사일여(生死一如)'='진눈깨비'인 셈이다.
그것을 비와 눈으로 구분하면 이미 진눈깨비가 아니라는
관념이다.
그러나 진눈깨비도 그 때 그 때의 기온에 의해 비와 눈의
비율이 변화하는 것처럼, 생사(生死)에서의 생과 사의 비율
역시 그 시대 배경에 따라 좌우되어 왔다. 예컨대 전란으로
날이 새고 날이 지던 시절이라든지, 대기근이나 역병(疫病)
이 만연한 시대에는 사(死)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그
리고 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시대에는 수시로 사를 입
에 올리며, 때로는 사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늘날과
같이 일상생활 중이나 상상 가운데 사가 눈에 띄지 않는 듯
한 생의 시대에는, 사를 패배이자 악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죽음을 기피해야만 할 악으로 인시갛고 생에 절대적 가
치를 부여하는 오늘의 불행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사
실 앞에서 절망적인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친척이나 지인 등 평소 가까운 타자(他者)의 죽음을 대하
더라도 일시적인 애석함이 느껴질 뿐이다. 평소 자신의 마
음 속에서 죽음을 인지하지 않는 탓에 타자의 죽음은 타자
의 죽음일 따름인 것이다. 타인의 죽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기연(機緣)에 이르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아침에는 홍안(紅顔)이던 것이 저녁에는,
백골(白骨)이 될 신세……"라던 렌뇨(蓮如)가 쓴 「백골의
장(章)」을 읽어주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놀라지도 않게
되어 버렸다.
기존의 종교는 시대의 변화를 좇아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인생의 사고(四苦)인 생로병사를 해결하는 것이 본래의 목
적이었을 불교가, 사후의 장의나 법요 쪽으로만 시선을 돌
려 목적을 잃은 채 교조적인 설교만 되풀이하고 있는 실정
이다.
그렇지만 그런 승려들과는 관계없이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 무를 씻고 있는 이 지방의 노파는, 나뭇가지에 남은
잎사귀가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나무아미타불'을 흥얼거린
다.
*
오늘도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다.
진눈깨비를 보면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의 진눈깨비의
시를 떠올리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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