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글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 윤재철 시집 「능소화」

안에서나를봐 2010. 1. 20. 19:39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옆 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는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어

왁자지껄한 잡담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로워지는 연습

술집을 빠져나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