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글

어느새 - 최영미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

안에서나를봐 2009. 12. 20. 13:14

어느새 / 최영미

 

사랑이 어떻게 오는지

나는 잊었다

 

노동과 휴식을 바느질하듯 촘촘히 이어붙인 24시간을

내게 남겨진 하루하루를 건조한 직설법으로 살며

꿈꾸는 자의 은유를 사치라 여겼다

고목에 매달린 늙은 매미의 마지막 울음도

생활에 바쁜 귀는 쓸어담지 못했다 여름이 가도록

무심코 눈에 밟힌 신록이 얼마나 청청한지,

눈을 뜨고도 나는 보지 못했다

유리병 안에서 허망하게 시드는 꽃들을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의식주에 충실한 짐승으로

노래를 잊고 낭만을 지우고

심심한 밤에도 일기를 쓰지 않았다

 

어느 날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

비스듬히 쳐다볼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