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글

전철에서 졸다 - 정철훈 시집「개 같은 신념」

안에서나를봐 2009. 12. 12. 16:15

전철에서 졸다  / 정철훈

 

 

몇 정거장을 지나친 것을 뒤늦게 알고

화들짝 일어섰다 멋쩍게 주저앉는다

늦은 장마철이어서 그나마 빈자리가 있었던 것인데

다리는 무겁고 눈꺼풀은 저절로 감기고

내 모르는 새 지나친 정거장만큼

생을 훌쩍 건너뛸 수는 없을까

내릴 곳을 잊은 채 두 눈을 멀뚱거리는

낯선 얼굴이 차창에 어룽댔다

실은 내릴 곳을 영영 잊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나친 정거장만큼이나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는 자각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스쳐 지나간 정거장으로 돌아가야 할지

그대로 앉아 있어야 할지

다음 행선지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서 내릴지